[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] (18)봄밤 - 송재학
2023. 5. 9. 09:29ㆍ제주 문화예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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봄밤 - 송재학
봄밤은 비애를 만진다
며칠 내내 빗소리
그 집은 지붕이 낮다
다리 저는 늙은 남자는 이불을 펴고
나이 찬 딸을 기다린다
딸이 엊그제 들여논 약장의
서랍은 스무 개도 넘는 약장의
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약장의
서랍마다 빗물을 채우고도
비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
도둑괭이가 암컷을 쫓아가 버린 밤
연탄 냄새마저 비에 막혀 고인다
마당 구석의 꽃들이 피우는 것은 봄
다리 저는 남자는 세상의 모든 늙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겠지만, 그가 누구든 유일무이한 한 사람을 지시하는 데에도 쓰인다. 다리는 세상을 걸어온 다리이며 세상을 걸은 탓에 절게 된 다리이다. 비는 그 남자에게 온다. 서랍이 스무 개도 넘는 약장은 지붕 낮은 '그 집'엔 존재하지 않겠지만, 두 부녀의 몸과 마음엔 분명히 들어 있는 약장이다. 서랍마다 약이 아니라 빗물이 채운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.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약장 같이 이야기하는 약장이야말로 이미 변형된 혹은 변형되기를 기다리는 늙은이 자신이며, 과연 나이 찬 딸과 함께 채워야 하는 빗물의 시간에 다름 아닐 것이다. 어쩌면 비는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. 우리가 읽은 시에는 비 오는 봄밤밖에는 아무것도 없고, 나머지 문장과 단어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할 수 있다. 이런 밤은 시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어서 모래톱처럼 씻기기만 하는 마음, 그거 아닐까. <시인>
화요일은 한라일보와 시 읽는 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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